역청

구약성경이 어렵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에 한 가지 중요한 원리를 알게 되면 참 놀라운 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조금은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만, 성경 해석 가운데 소위 ‘예표론’ (typology)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설명이 필요합니다만, ‘예표론’을 영화에 빗대어 해석하면 어느 정도 이해하기가 훨씬 수월해 집니다.

영화에는 항상 본편과 예고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편에 앞서 보여주는 예고편은 본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고편을 보다보면 본편의 내용이 궁금해지고, 또 그 내용의 줄거리를 예상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예고편은 항상 흥미진진합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예고편을 보면서 관람객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예고편은 본편을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구약성경 그 자체만으로도 이야기하는 내용과 줄거리가 있습니다. 이것을 부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본편과도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내용을 예의주시하여야 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방주’입니다.

필자는 꽤 오래전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는 칼럼을 쓴 적이 있습니다. 성경은 방주라고 번역한 히브리어의 ‘테바’는 단순히 배라고 보기에는 뭔가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에서 ‘배’라고 번역하기에 적합한 ‘스피나’(요 1:3)라는 단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방주’라고 번역한 ‘테바’는 단순히 ‘배’를 의미한다기 보다도 ‘배’를 상징하지만 더 나아가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자 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에 정말 적합한 용어였습니다. 

그 당시 이러한 내용의 칼럼을 쓰면서 마음에 걸린 것이 한 가지 있었는데 방주 이야기를 할 때 반드시 언급해야 할 내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역청’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내용이 다소 복잡해 보이지만 2~3회에 걸쳐 최대한 알기 쉽게 말씀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창 6:14) 라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대목입니다만, 이 말씀을 주목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고 하신 후 이번에는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창 6:15)라고 말씀합니다. ‘방주의 길이와 너비와 높이’ 즉 외관에 관한 내용입니다.

저는 배를 한 번도 건조해 본적도 없고 또한 배에 대해서는 문외한 입니다만, 이 말씀은 상식적으로 잘 납득이 되지 않아 보입니다. 배를 건조할 때에 외관을 먼저하고 세부적인 것은 나중에 하는 것이 당연한 상식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보다 “방주의 칸을 만들어 역청을 칠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저 같으면 “노아야 길이는 300규빗, 너비는 50규빗, 높이는 30규빗이니 이렇게 만든 후 반드시 역청을 칠하거라”고 말했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먼저 역청 이야기를 하신 후 방주의 크기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만, 저는 하나님이 배 건조의 순서를 모르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는 역청 작업이 그만큼 중요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역청 작업이 주는 메시지가 특별하기 때문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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