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전도열매
‘원산송흥리교회와 후손, 그리고 후포교회’가 그의 열매다. 지금 천국에 있을 송흥리교인들과 한국에 남겨진 후손 신자들이다. 특히, 후포교회가 81년 동안 길러낸 수많은 구원의 백성과 후포교회에서 믿음을 가진 분들에 의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 이것이 그의 가장 큰 열매다.

송흥리교회를 간략히 소개한다. 지금은 농촌지역이지만, 1936년 설립 초기부터 급성장하여 한때는 경기도 내의 본교단교회 중에 대여섯 번 째가는 교세를 자랑하였으며, 1970년대까지 만해도 여주·이천·양평지역 성결교회에서 여러모로 중심역할을 했다. 교역자도 20여 명 이상 배출했고, 근동의 율촌교회(현 예성 대신교회), 상구리교회(현 벧엘교회), 천남교회를 분립지교회로 세웠으며, 하자포교회(현 개군교회), 계전교회, 왕대리교회, 오금리교회(현 부흥교회), 한강교회 등의 설립에 직간접적으로 협력하였다. 현재 은퇴한 장로 6명과 4명의 시무장로가 있으며, 이강섭 목사가 22대 담임교역자로 시무하고 있다. 지역사회에 뿌리를 잘 내린 안정된 농촌교회다. 

‘신복성 장로’는 신치정 영수의 전도열매 중 대표적 인물이다. 37세에 장로가 된 신복성은 신치정 영수가 마련해준 기름틀을 기반으로 영농대가가 되기까지 충성되고 모범적 신앙과 삶에 있어 그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후포리와 서울 천호동에 과수원을 비롯 양계, 양돈, 양봉장을 운영하고 원예작물 등도 재배했다. 특히, 해방 전 후 배고픈 시절, 여주·양평·이천 일대에 고구마를 보급·경작 지도하여 주린 농민을 살린 ‘고구마할아버지’로 유명하다. 영농학교 계림원(1940년대), 농촌자립연수원(1970년대)을 설립하여 농민과 그 후계자를 교육했고, 해방 후 여주 대신면에 풍양동마을과 서울천호동개척단마을을 설립하여 난민구제에도 힘썼다. 1946년, 후포리에 대신중학원을 설립하여 농민자녀를 교육하는 등의 대사회활동으로 교회의 문을 넓게 열었다.

‘대신중·고등학교’는 신복성 장로가 설립한 학교로 후포교회와 지대한 상관관계에 있었으니 신치정 영수의 열매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신앙과 덴마크개척정신을 기치로 설립한 대신학원은 1960년대 까지만 해도 경향각지에서 학생들이 모이는 유명사학농업학교였다. 학교발전에 공로자는 초대 임세흥 교장(후포교회 장로)이며, 아들 임희창 목사가 5대 교장으로 재직 중이다. 지난 71년간 수많은 신자와 교역자를 배출하였으며, 지금은 근동의 명문 중고등학교다. 

그의 생사와 하나님나라 
공산당의 만행을 잘 아는 신치정은 해방 후와 1.4후퇴 무렵에 자녀들을 남하시켰다. 자녀들에게 내일의 장구한 행복을 마련해준 부모요, 신앙인으로의 장래를 축복해준 영적 부모였다. 그러나 자신은 그냥 홀로 북에 남았는데, 이것은 못 온 것이고, 안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불원간 극심한 핍박을 받아야할 송흥리 교인들, 목자마저 잃고 헤맬 그들을 버리고 당신만이 안전한 곳으로 향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희망의 닻줄을 붙잡고 피눈물 나는 기도했겠지만, 역사는 그가 주님 지신 십자가를 지게 그냥 내버려뒀다. 자기 십자가로 알고 영문 밖 골고다까지 가도록. 남북의 왕래가 끊긴 후 원산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모르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요셉이 고향에 갈 수 없어 유골을 가나안에 묻어달라고 유언하였듯이 그도 갈 수 없는 고향과 후포교회를 애타게 그리며, 그 뜰에 묻히기를 원했으리라. 그러면서 아브라함과 이삭처럼 더 나은 본향을 그리워하였다고 믿고 싶다. 후포교회 성도와 남하시킨 자녀들, 그리고 번성할 육신적·영적 후손들과 하나님나라에서 만날 것을 믿었으리라. 후포교회가 할 일이 있다. 통일되면 송흥리교회 재건과 신치정 영수의 유골을 발굴하여 후포교회 뜰에 안치하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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