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3.1운동 100주년을 맞는다. 1919년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기 위해 일어난 3.1독립만세운동은 그 당시 각 종교계 지도자들이 앞장섰지만 가장 주도적으로 참여한 종파는 기독교였다. 3.1만세운동의 민족대표 33명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 하지만 역사의식 결여와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등으로 3.1 운동에서 기독교의 역할이 폄훼되거나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동학의 후예 천도교가 3.1운동을 이끌고 서학의 후신 기독교가 보조를 맞추어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또 기독교가 정교분리원칙에 따라 3.1운동과 독립운동에 소극적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일반 역사학계나 언론에서 이런 주장에 동조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르다. 3.1운동은 종교인들이 힘을 모아 시작했지만 천도교가 주도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기독교는 3.1운동 준비점화 단계에서 전국민 만세운동 단계, 이후 독립운동과 국가건립 단계 등 모든 단계에 동참한 종교였다. 특히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미국에서 일어난 독립운동, 일본 2.8독립선언, 상해 만세운동 역시 기독교가 주도적이었다. 3.1운동에 영향을 준 여러 사건과 그 준비과정에서 기독교가 주도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는 만세운동에도 가장 앞장섰다. 3월 1일 첫날 서울 외 7곳이 대부분 개신교 중심이었고, 의주와 평양은 목사들이 주동했다. 천도교 측과 합작해 운동을 추진한 지역을 311개로 정리했을 때, 그중 개신교가 78개 지역, 양교 합작지역이 42개였다. 당시 2000만 국민 가운데 1.5%에 지나지 않는 30여만 명에 불과했던 기독교인들의 약 89%가 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드러났다.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을 외친 개신교 주동세력은 무려 25~38%에 이른다.

전국 지방단위로 조직돼 있는 교회가 지역 독립운동의 거점역할을 감당했고 만세운동이 급속도로 확산되도록 한 통로가 됐다. 기독교인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그로인해 다른 종교보다 일본의 박해도 컸다. 체포 투옥된 개신교인들은 17~22%의 수치를 보였다. 일제에 의해 47개의 교회와 8개의 미션계 학교가 완전 파괴되었다. 당시 경성성서학원(서울신대 전신)도 휴교가 되었고, 성서학원 재학생과 졸업생 등 다수도 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옥고를 치렀다.

이런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로 인해 기독교 관계자들이 상해임시정부에 대거 참여하게 되었다. 이는 한국교회가 민족 앞에 두고두고 자랑할 만한 일이기도 하다. 선교사들도 외부적으로는 정교분리원칙을 지키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에서는 일제에 항의하고 3.1운동을 널리 알린 촉발제가 되었다.

그럼에도 기독교에 불만을 가진 세력들은 3.1만세운동에서 기독교가 한 일이 뭐가 있느냐고 폄하한다. 일제의 회유와 협박에 견디다 못해 부역한 몇몇 기독교 대표 민족지도자들의 친일행위를 내세워 한국 기독교 전체의 3.1만세운동을 부정하려 하는 것이다. 그들이 일제 말 바람직하지 못한 길을 걸었다고, 3.1운동에 참여한 그 대의, 그 자세를 폄훼시킬 수는 없다. 이번 기회에 한국교회가 독립운동에 관련된 공과를 객관적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기독교가 이번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를 거 교회적으로 준비하여 민족 앞에 다시 한 번 교회의 애국심을 드러내야 한다. 이번에야 말로 한국교회가 하나로 똘똘 뭉쳐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민족운동, 애국애족의 운동을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 3.1정신을 이어받아 다른 종교와의 화합과 일치를 통해 국민이 주인되는 나라를 공동으로 만들어내는데도 앞장서야 한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