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여행에서 돌아왔다. 특별한 목적지를 정해놓지 않고 길을 걸었던 여행의 감각이 신선하게 살아있다.
지금까지의 시간이 자신을 재촉하거나 바쁜 일정 속에서 무언가를 이루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었다면, 이번 여행은 최대한 늑장을 부리며 동행한 지인이 제안하는 대로 길을 따라 걷다가, 어두워지면 숙소를 정해 하룻밤을 자고, 또 다른 하루를 시작하고 다음날이 이어지는 매임이 없는 여행이었다.

적상산에도 갔고, 매동마을에서는 밤이 모자라는 대화를 주고받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남해 상주해수욕장에서의 야영, 남해금산의 푸른 하늘가, 열매랑뿌리랑 가득 담아주는 민심. 그런 것들을 접하며 웃음과 감동이, 존중과 연대가 끊이지 않는 여행이었다.

자신을 던져놓고 시간 속을 유영하듯 여행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걷고 있는 내 자신이 현실의 내가 아닌, 나도 모르는 어떤 시공간 속에 던져진 나라는 생각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망명작가 밀란 쿤데라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옛날의 그 한량들, 민요들 속의 그 게으른 주인공들, 이 방앗간 저 방앗간을 어슬렁거리며 총총한 별 아래 잠자던 그 방랑객”이었다.

세상사로부터 멀어진 나 자신이 나그네일 뿐만 아니라 길 그 자체가 되어 펼쳐져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우리가 나누는 평범하지만 격의 없는 대화는 분명 어떤 수준을 갖춘 텍스트가 되었고, 그래서 사람이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하면 세상에서 가장 맑은 순수함에 닿을 수 있다는 확신에 사로잡히기까지 하였다. 물론 이런 즐거움은 동행자가 나의 비논리와 좌충우돌을 모두 받아주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과거 이런 여행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그런 것을 넘어섰다. 불편해서 가변성에 지배당하기 쉬운 여행지에서 결코 흔들림 없이 다시 훗날의 길 떠남을 고대하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느린 템포와 상대를 위한 배려의 깊이에서 나온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느림의 호사스러움을 누린 7일간의 여행이 끝난 곳에서의 현실은 그러나 각박하게 들끓고 있었다. 광화문에 불법 천막은 다시 등장했고 정치적 관점을 달리하는 사람들의 막말의 수위는 한층 높아져 있었다. 한국에 대한 반도체 소재의 수출규제 조치를 발표한 아베 신조 일본 내각의 지지율이 한 달 전보다 크게 하락한 43.1%로 나타났고, 한국갤럽은 7월 2주차 여론조사 결과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이 전주 대비 4%포인트 떨어진 45%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일본의 수출규제조치 이후 시작된 일본 제품 불매운동은 일본 정부의 잇따른 자극적 발언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한국의 일본여행 자제가 계속돼 누적 방문객이 줄면 아베 정권에 부담을 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역 항공과 숙박, 요식업이 맞물려 있는 관광산업군 종사자들이 주요 지지층인 아베 정권은 2차 보복과 화이트리스트 삭제로 대응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누구에게도 이익이 되기 어려운 전쟁이 펼쳐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진정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머나먼 여행을 마친 다음이라야 가능할 것이다. 넘어지고, 길을 잃고, 지치고, 그런 어떤 순간에 각성을 하고 눈물을 머금고 돌아온다.

그렇게 돌아온 그는 이미 다른 사람, 즉 ‘타자’가 되어있다.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머나먼 길을 걷고 우회해야 가능할 것이다. 똑같은 집나감과 돌아옴뿐인 습관적인 여행을 하지 않으려면, 동어반복인 언어를 소유하지 않으려면, 구체성 없는 생각과 말에 머물지 않으려면 우리는 때로 타자와 만나야 할 것이다.

가끔은 스스로 타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돌아본다. 그 길 위에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았는지를.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앞으로도 기쁘게 걸어갈 준비가 되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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