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학교

이종무 목사
광주 학동에 위치한 숭의학원의 숭의중?숭의종합고등학교는 1958년 5월 6일 김신근 목사가 피얼스 박사의 후원을 얻어 설립했다. 김 목사는 ‘굳건한 믿음, 뜨거운 사랑, 꾸준한 노력’이라고 교훈을 정했다.

또 그는 1972년과 1974년에는 신의여자중?고등학교를 설립했다. 우리나라 산업발전을 위해 30여 년간 실업고등학교로 일관한 것이다. 특히 김 목사는 당시 문교부 당국자에게 실업교육의 절대 필요성을 역설한 실업교육 선구자였다.

1960년대에는 5회에 걸쳐 미국과 독일, 이스라엘, 덴마크, 일본 등 여러 나라를 직접 방문해 기독교 교육과 실업교육의 실태도 시찰했다. 그는 그 경험을 토대로 교육의 청사진을 그렸고, 학교를 발전시켜나갔다.

대구의 정화여자중?고등학교는 도영춘 장로가 ‘여성들을 기독교 신앙으로 무장시켜야 민족이 산다’는 신념으로 설립한 학교다. 도 장로는 정화여중과 여고를 발전시킨 후 성화여자중?고등학교도 설립했다. 그는 이 학교들을 대구의 양대 명문 사립학교로 성장시켰고, 크리스천 인재양성에 기여하게 하였다.

여주군 대신면 후포마을에 세워진 대신중학교도 성결교회 중요한 신앙교육의 역사를 품고 있다. 대신중학교는 1948년 한의사이며 근대한국식물본초학 권위자 임세흥 장로와 농촌계몽운동가 신복성 장로가 대지 4만 평을 매입하여 설립하고 임세홍 장로가 교장으로 취임했다. 임 장로는 ‘하나님을 사랑하자. 민족을 사랑하자. 학교를 사랑하자’를 교훈으로 정했다.

이 학원은 당시 가나안농군학교와 쌍벽을 이뤘다. 대신중학교는 신복성 장로가 여주군으로부터 불하받은 밭 15만 평을 개간하여 땅콩 농사를 지어 얻은 소득과 임 장로가 한의사 사업으로 얻은 소득으로 원활히 운영되었다. 1952년에는 학교 부지 6만 평을 매입하여 후포교회 교인들과 주민의 노력 봉사로 터를 닦고 교사를 신축하고 1955년 농과 3학급, 축산과 3학급의 대신농업고등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았다.

충무교회 박후진 장로가 설립한 성만여자상업전수학교는 이후 경복여중과 경복여상, 신경여중과 신경여상, 선덕중학교와 신덕고등학교로 크게 확장되었다. 또 홍종현 목사가 설립한 부여은산고등공민학교와 부여 불량청소년 선도고등공민학교는 은산공립중학교의 모체가 되었다.

황의철 목사가 설립한 대천의 대명중학교는 대천 중?고등학교로 발전했다. 원홍묵 장로가 설립한 원주대학은 운영난으로 안타깝게 타인에게로 넘어갔는데, 현재의 상지대학교가 되었다.

이 밖에 장항의 김옥선 장로가 원산도에 정의여고와 원의여고를 설립했고, 부산의 정기석 장로는 덕원중?고등학교를 설립했다. 김기삼 목사는 1957년 지병으로 휴양 겸 목회를 위해 서남해안 흑산도에 내려가 그곳에 흑산중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봉직했다. 평택의 최익수 목사는 평성중학교를 설립했다.

다는 아니지만 거의 OMS의 협력자금으로 운영에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안다. 그러나 몇 학교를 제외하고는 거의 운영난으로 넘어가거나 폐쇄됐다.

어느 면에서 보면 직접 전도에만 주력해온 성결교회는 교육사업이 생리에 맞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재정의 계속적인 후원이 끊어진 것, 교육행정에 대한 기초부족, 공리보다 사욕에 치우친 운영, 교단 분열로 인한 힘의 균열상황이 교육사업을 주춤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교육사업 같은 간접전도에 인력과 재력의 투자에 관심이 부족했던 것은 중산층을 흡수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서구에서 기독교가 세계 문명을 주도한 것은 엘리트 선교의 황금어장인 유구한 명문학교나 복지기관 등 간접선교의 요인이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국도 유수한 명문학교나 의료원 등 엘리트 선교의 황금어장을 구축한 장로교회나 감리교회는 선교의 효과로 성장 발전했다. 성결교회가 미션학교 설립확장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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