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무욕, 무통장의 청렴결백한 능력의 목회자

당시 교역자들이 대부분 그랬다고 하지만 특히 최 목사는 가난을 마다 않고 벗 삼아 굶기를 밥 먹듯 하면서도 이를 당연하게 여겼다. 최 목사의 평생의 친구인 태성리교회의 황의철 목사가 방문했다. “종진아, 밥 먹었니?” 종진이는 서울신학대학교 총장을 지낸 장남 최종진 박사다. “엄마가 준 풀을 먹었어요.” 엄마는, 밥이 없어서 다섯 살짜리 아들에게 추석 준비로 방문을 바르고 남은 풀을 먹일 수밖에 없었다.

황의철 목사의 말이다. 부흥회를 갔는데, 식사를 하고 일어서니 종진이가 “즈덜은 밥 먹고 나는 풀을 주고…….”하며 울더란다. 최종진 박사의 말이다. “길산교회에서였다. 어머니는 신자들한테 쌀 없는 걸 안 보이려고 했다.

나는 어머니와 솥에 눈을 퍼다 넣고 밥 짓는 시늉을 했다. 담장에 바싹 말라붙은 호박넝쿨을 거둬 왔다. 넝쿨에 가시가 따갑다. 남들 밥 짓는 시간에 우리도 이렇게 밥을 하는 거다. 연기가 꾸역꾸역 오른다. 불을 다 때면 솥에는 눈이 없고, 퍼 담을 밥도 없다. 그래도 자주 이렇게 없는 밥을 해야만 했다.”

1950년대 끼니 걱정하던 가난한 시대, 가난한 목회자 가정의 서글픈 모습이다. 종진 소년의 터진 손이 안쓰럽고, 사모님의 젖은 눈이 슬프다. 하염없이 하얀 김만 뿜어대는 솥을 쳐다보는 소년의 두 눈이 애잔하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최 목사의 목회신념은 변함이 없었다.

평생 무욕, 무통장의 청렴한 생활을 결심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대로 먹고, 남으면 교회에 바쳤다. 소천 후에도 토지 한 평, 통장 하나, 유산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오히려 빚이 남았을 뿐, 자녀들이 부의금으로 빚을 정리했다. 그렇지만 부모님 두 분이 구원받고, 자녀 6남 2녀 중에 목사가 4명, 집사가 4명에 자부와 사위에 손자들까지 하면 최 목사로는 적지 않은 복음의 열매를 남긴 셈이다. 

최 목사의 목회관이다. 첫 번째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만 의지하고 자신이나 지혜를 앞세우지 않으려 했다. 안 되는 일이 있어도 낙심하지 않고 끈기 있게 하나님을 신뢰했다.

두 번째 나의 유익보다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며 살려고 애썼다. 세 번째 부동산이나 예금통장을 가지지 말 것을 철저히 이행했다. 그러나 동역자에게 권하고 싶지는 않다. 장남 결혼시킬 때 너무나 당황했다. 지금도 자식들에게 미안할 뿐이다.

네 번째 나의 길은 오직 십자가의 외길인생이라는 정신으로 출발했다. 그렇게 살지 못한 것이 죄송할 뿐이다. 그러나 실망 않고 다시 걸어가려고 했다. 다섯 번째 이미 주께 바친 몸이니 내 마음대로 살 수 없다. 마지막은 번제물로 드릴 것이다. 나는 이를 원한다. 여섯 번째 목회자의 승리 방법은 오직 십자가다. 기도와 말씀 붙들고, 말씀이 심령에서 생수같이 터져 강단이 메마르지 않게 하려는 일념이었다.

일곱 번째 목회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는 확신이다. 하나님 외에 물질이나 명예에 집착하면 차라리 그만두는 것이 좋다. 하나님만이 나의 반석이요, 피난처, 나의 모든 것이라 믿고 달려왔다.

자제들과 길산교회, 지교회인 동산교회 출신 교역자들, 또 목회자로서 그를 보아온 여러분들이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순수하고 인자하고 자상하며 다정다감한 아버지, 성도와 교회, 영혼 사랑이 극진함, 선한 목자, 사랑의 사도, 말씀 연구와 칠판설교, 말씀주의, 복음중심, 철저한 중생의 복음 설교, 하나님만 바라보는 예수 중심, 청빈자세, 교회부흥과 전도에 열정, 많은 기도와 뜨거운 신앙, 방언, 예언, 입신 등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 능력의 목회자 ……”

최 목사는 참으로 모범적인 선한 목자로 오직 목양일념의 열정으로 사신 분인 것을 증언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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